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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 박종규, 서민정 <울리(鬱離)>

2021.06.02-06.30

 을갤러리의 6월 기획전시 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발한 활동을 구가하고 있는 김현식ㆍ박종규ㆍ서민정의 그룹 전이다. 이 세 작가는 새로운 예술형식과 스타일을 찾아 오랜 시간의 예술이력을 밟아왔으며,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각광 받고 있다.

 ‘울리(鬱離)’라는 한자어에서 ‘울(鬱)’은 문채가 나는 모양을 뜻한다. 즉 스타일과 예술형식을 의미한다. ‘ 리(離)’는 동아시아의 고전인 (주역(周易))에 나오는 이괘(離卦)를 뜻하며 두 개의 강한 에너지가 하나의 부드러운 에너지를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밝게 빛나는 불을 뜻한다. 세 작가가 선취한 예술형식이 밝은 빛과 뜨거운 에너지를 닮았기 때문에 전시 제목을 ‘울리’라고 지었다.

 ‘울리’라는 말의 어원은 원말명초의 혼란기에 활약했던 대문호 유기(劉基, Liu Ji, 1311-1375)의 저서인 ‘ 울리자(鬱離子)’에서 따왔다. 이 책은 혼란기에 빛이 되어 새로운 국가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이번 전시를 ‘울리’라고 지은 것은 몇 개의 문제의식에서 발로되었다. 현재 글로벌 현대미술은 크게 1) 선정주의적 예술(sensationalism), 2) 모더니즘의 동어반복(remodernism), 3) 스펙터큘러리즘(Spectacularism)으로 특징이 나눈다. 새로운 형식에 대한 고민과 예술의 진정성 있는 의제에 대한 열의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또는 의제를 개발하지 못하고 있다. 김현식은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3차원적 회화의 가능성을 묻고 있다. 박종규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사고(탈역사의 징후)와 독창성(모더니즘의 원리)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지 고민해왔고 뉴아트에 대한 단초를 마련했다. 서민정은 사회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사건을 설치미술로 극화시킨다. 폭발하는 순간을 재현하거나 죽음과 같은 침묵을 시각적으로 펼쳐낸다. 작가에 대한 설명을 상세히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박종규 작가는 시안미술관, 대구미술관, 홍콩아트바젤, 뉴욕 아모리쇼에서의 개인전으로 그동안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뉴미디어 아티스트이다. 작가는 영상ㆍ설치ㆍ조각ㆍ회화 등 각 장르를 넘나들며 각종 미디어의 속성을 탐구한다. 특히 ‘노이즈’라는 현상에 주목한다. 노이즈는 정확한 정보 수용을 방해하는 장애물(ob-iectum)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장애물을 넘을 때 진전(progress)이 이루어진다. 박종규는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노이즈를 최대한 확대하여 이미지를 만들고 시트지로 출력해 캔버스에 앉힌다. 시트지는 파지티브(positive)면만 살아남고 네거티브(negative)면은 제거된다. 그 위에 붓질을 하고 다시 시트지를 제거한다. 결국 살아남은 최종의 물감 층은 본질적으로 네거티브이다. 따라서 네거티브는 부정적으로 들리지만, 그리고 부정을 뜻하지만, 반대로 찬연(燦然)하고 아름다운 결과를 빚어낸다. 박종규 작가의 새로운 회화(뉴 페인팅)는 뉴미디어와 모더니즘 회화(미니멀 페인팅)의 변증적 투쟁에서 비롯된 것이며 선악(善惡)ㆍ호오(好惡)ㆍ고저(高低) 등 우리의 이분법[Cartesian ego]과 모더니즘이 지닌 위계적 사고[vertical values]에 대한 재고를 촉구한다.

 김현식 작가는 나무 프레임에 레진을 부어 오랫동안 단단히 굳힌 후 송곳으로 수많은 수직선을 그어 병치시킨다. 굳은 수평의 레진 표면 위로 수많은 마루(crest)와 골(trough)이 경이로운 규칙을 이룬다. 이 표면에 아크릴 물감을 칠하고 마루에 묻은 물감은 닦아낸다. 오로지 골속에만 물감이 남게 된다. 그 위에 다시 레진을 부어 오랫동안 굳힌다. 다시 송곳으로 마루와 골을 만들고 다른 색채의 아크릴 물감을 바른다. 물감을 닦고 또 다시 레진을 붓는다. 이러한 반복 속에서 글로시한 회화의 표면 아래의 심연에서 수많은 층위의 선들이 깊이를 이루어 무한의 빛과 그림자를 발산하며 또 관람자의 시선을 한없이 그 심연 속으로 끌어들인다. 김현식 작가는 반복적인 육체의 수행과 시간의 흐름을 하나의 화면에 영속적으로 보존시킨다. 유한한 인간의 노동은 빛이라는 영구한 신성과 하나가 되어 그 숭고한 가치를 상기시킨다. 김현식 작가의 새로운 회화 방법론은 뉴욕과 브뤼셀, 런던, 파리 등 유럽의 주요 미술관에서 지대한 관심을 끌고 있다.

 서민정 작가는 유럽과 아시아 등지의 비엔날레와 미술관에서 초대받아온 대표적인 영상설치미술가이다. ‘유물(The Remains)’과 ‘순간의 총체들’의 영상과 설치미술 연작으로 순간과 영속, 창조와 파괴,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 변화와 불변이 서로 둘이 아님을 강력하게 역설해왔다. 작가는 “창조와 파괴는 다른 언어가 아니다. 하나의 단어라고 생각한다. 폭파하면서 확장되고 해체가 되면서 다른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발언한다. 실제 유물들(과거의 시간)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삶의 공간(현재의 시간)을 흰백의 순수로 표백시키면서, 또 표백된 공간을 파괴의 순간으로 정지시키면서, 우리의 가치관과 편협함을 고요하게 일갈(一喝)한다.

 

 이번 전시‘울리(鬱離)’에 대하여 김을수 대표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미술에 대한 새로운 계기가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본원의 의미를 묻는 작가가 항상 소리 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번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예술과 사회, 그리고 그 양자 속에 놓여있는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을 통해 스타일과 형식을 구축해낸 작가들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예술의 깊이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다.”고 발언한다. 세 작가의 형식과 에너지를 통시에 표현한 ‘울리’ 속에는 혼돈기의 세계미술에 대한 을갤러리의 자신감이 숨 쉬고 있다.

                                                                       이진명 (前 대구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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