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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 KEA NAM

차계남 

2020.09.01-10.10

'선(禪) 한 선(線)'

 

전시장에 들어선 이를 커다란 크기와 묵직한 무게감으로 압도하는 작품으로 차계남은 '크고, 검은 화면의 작가'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을갤러리가 마련한 이번 전시는 차계남의 크고 검은 화면에서 벗어나 그간 좀처럼 주목받지 못했던 작가의 '선(線)' 자체에 주목하고자 한다. 일본에서 섬유를 공부한 작가는 오직 그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독특한 방식으로 그의 작업의 근간이 되는 실을 만든다. 작가는 서예와 사군자를 배우며 먹으로 반야심경을 쓰기 시작하며 쌓인 수많은 한지는 그가 만들어내는 커다란 화면을 이루는 선의 재료가 되었다. 차계남은 그렇게 새로운 매체를 만나며 지금의 선과 작품 형태를 구축하게 되었고, 이 만남은 그의 작품 세계에서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오게 되었다.

 

작가는 매일을 수양하듯 먹을 갈고 마음을 담아, 글을 쓴 수천 장의 한지를 1센티미터의 간격으로 자른다. 가늘게 자른 한지를 한 줄 실에 얇게 꼬아 희고 검은 무늬를 품은 커다란 타래를 만든다. 그렇게 오랜 시간 한자리에 우직하게 앉아 한 올 한 올 꼬아낸 차계남의 선은 수 백 수 천의 글과 점과 선을 그려 지나간 흔적과 흰 여백을 함께 품으며 작은 부피를 가진 ‘선’으로 그 형태가 전이된 것이다. 즉, 작가는 그의 작업의 재료인 선을 직접 만듦과 동시에 읽고 해석할 수 있는 글의 의미와 상징을 잘라내어 해체하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는 시도를 담아낸다.

 

그의 작업에서 재료가 된 글자와 실 가닥 위에 드러나는 점은 먹으로 쓴 글이 의미를 가지게 되는 그 탄생의 순간을, 그것들이 해체되어 드러나는 선은 작가에게 무한 반복되는 시간의 여정을 의미한다. 작가는 이렇게 직접 만든 실을 가지고 화면의 폭과 길이를 치밀하게 계산하며 차곡차곡 실타래를 풀어 이어 붙인다. 한지와 먹이라는 재료를 만나며 시작된 차계남의 작업은 씨줄과 날줄을 짜 엮는 섬유 예술과 다르게 화면에 실을 접착하는 기법을 도입하며, 진정한 의미로서의 섬유 예술로부터의 결별을 선언한다. 한지를 꼬아 만든 실을 화면에 붙이는 행위로의 전환은 그가 이어왔던 작가 의식의 대대적인 전환과 동시에 이미 가득 가진 것을 버리고 스스로를 새로운 것으로 채우려는 치열한 구도의 자세가 담겨있다.

 

차계남은 하나의 실타래를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는 무심(無心)의 마음으로 가로로 또는 세로로 붙여 이어나가기를 반복함으로써 몸과 마음이 먼저 반응해 그리고자 하는 것을 규제하고 통제한다. 그의 화면에서 은은하게 드러나는 흰 여백은 그것 그대로 여백의 덩어리로 남기도, 또 먹이 지나가며 남긴 흑색의 점과 선이 어우러져 드러나고 사라지며 유와 무의 현상이 우연과 필연으로 유기적으로 겹쳐진다. 선을 붙이며 이어나가는 행위는 어떠한 대상을 재현하거나 표현해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무작위적으로 반복된 행위가 차곡차곡 쌓여 그대로 남는 작가와 그의 신체의 순수한 행위만을 남겨 보여준다.

 

차계남이 잣는 실은 '선(禪) 한 선(線)'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작업실에서 온종일 종이를 잘라 실을 꼬아 만들고 또 화면에 반복해 붙이는 과정은 오랜 시간과 마음을 다해야만 하는 인고의 과정을 거치며 구체적인 형태를 금새 드러나지 않는다. 오랜 지긋함을 견뎌야 만날 수 있는 그의 작업 과정은 마치 고행과도 같은 오랜 시간을 거친 몸의 노동의 결과물이다. 동시에 수직, 수평으로 이어진 선의 몸짓과 반복은 작가의 정신과 마음을 그대로 담은 하나의 수행의 산물이다. 차계남의 ‘검은 작품’이 내뿜는 묵직한 힘과 무게를 거슬러 가까이 다가가야 그의 흑백의 화면에 드러나는 다양한 무채색을 읽을 수 있다. 마치 은은한 향기를 품은 숲을 산책하듯 몸을 움직여 걸으며 작품에 다가섰다 물러서기를 반복해 이동하며 보아야 한 올 한 올 꼬아낸 실에서 흰색에서 옅은 회색, 옅은 검정, 진한 먹색 등 다양한 무채색들이 검은색으로 수렴되는 그 다채로운 결합을 볼 수 있다.

 

수백수천 장의 화선지와 그것을 잘라 꼬아낸 한지 실타래가 가득 쌓여 깊은 먹 냄새가 가득한 작가의 작업실에서 '나는 오로지 이것 만드는 것 밖에 할 줄 모른다.'라고 말하는 차계남의 말은 우리의 마음에 커다란 울림을 던져준다. 형용하기 힘든 숭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5미터의 이르는 거대한 작품 앞에서 작은 체구로 다른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작가의 말이 안타깝고 애틋하기보다 대단해 보이는 까닭은 그가 오직 작품에만, 예술에만 쏟아부은 오랜 시간과 매일의 끊임없는 열과 성을 다한 치열한 탐구의 자세 때문은 아닐까.

 

이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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