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ological level
홍명섭 HONG, Myung-Seop
2020. 6. 9 - 7. 11
미술평론가 류병학
토폴로지컬 레벨
을 갤러리는 전시장이 2곳으로 분류되어 있다. 1전시장은 대구 남구 이천동 고미술거리의 대로변에 위치한 3층 건물의 1층에 위치해 있고, 2전시장은 대로변 건물 뒤편에 위치한 단 독 건물로 이루어진 천고가 8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전시장이다. 홍명섭은 1전시장에 토폴로 지컬 평면 5점과 토폴로지컬 조각 2점을 전시해 놓았고, 2전시장에 단 한 점의 토폴로지컬 설치작품을 설치해 놓았다.
홍명섭의 토폴로지컬 평면 5점은 엠디에프(M.D.F)와 스테인리스 스틸판(stainless steel plate) 에 기하학적인 현상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그 기하학적인 형상은 레이저 광선으로 그을린 것으로 마치 400자 원고지(squared manuscript paper)처럼 보인다. 홍명섭은 ‘원고 지’ 가운데 부분을 레이저로 절단(laser cutting)하여 비스듬히 기울여 놓았다. 따라서 관객이 일정한 규격을 가진 수평면들로 이루어진 ‘원고지’ 중앙을 보면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홍명섭의 토폴로지컬 조각 2점은 각각 정육면체와 원형의 ‘기괴한’ 변형체들이다. 홍명섭은 그 조각들을 ‘메타-큐브(meta-cube)’로 명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메타-스퀘어/메타 -큐브(meta-square/meta-cube)는 70년대 초 학창시절부터 나타난 비시대성과 탈인간적 관 심사로 엮긴 ‘스퀘어 오퍼레이션’ 시리즈들(데뷰전)의 연장선상에 있다. 시기적으로는 오래된 관심사이지만 내 작업들이 그렇듯, 언제든지 ‘시대착오적’으로 다른 시간대로 역류하면 새로 솟구쳐 오늘 나의 작업으로 되/살아난다. 그러니 내 작업엔 과거란 없다. 단지 ‘지금과 여기’ 를 형성시키고 지금의 차원으로 개입해 가는 새로운 기억이 있을 뿐이다.”
을 갤러리 2전시장에 홍명섭은 거대한 전시장 바닥 형태를 따라 단 한 점의 설치작품을 설 치해 놓았다. 그는 거대한 전시장 바닥에 500개의 리놀륨판들(linoleum plates)과 스테인리 스 스틸 막대들(stainless steel sticks)로 가로 5미터와 세로 5미터 10센티에 달하는 일종의 ‘바닥’을 만들어 놓았다. 홍명섭은 이 작품을 <레벨 캐스팅(level casting)>이라고 명명하고, 부제로 ‘바닥이 되다(becoming a floor)’라고 붙였다. 따라서 관객은 그의 작품을 발로 밟을 수 있다. 홍명섭은 ‘토폴로지컬 레벨(topological level)’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물은 언제나 수평을 찾아 흐른다 . 스스로 수평이 되기까지 흐르는 것이다 . 물은 그렇게 수평 을 찾고자 하는 지난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 거대한 호수의 수평면을 어떻게 하면 하나의 조각작업으로 포획하듯 그대로 떠낼 수는 없을까 ?
한겨울 , 호수가 얼어붙으면 그 표면의 매끄러운 얼음판이야말로 곧 수면을 캐스팅한 것이 아닌가 . 한겨울이 되면 스스로의 모습 , 수평의 모습을 드러내는 수면을 나는 ( 그대로 ) 조각 작업으로 이끈다 . 지상으로 .
광활한 수면을 칸칸이 잘게 잘라내어 또 하나의 장소로 한 장 한 장 옮겨서 다시 수면이 ‘되게 ’ 조립해 나간다 . 여기서 저기로 ,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조립하는 반복이 펼쳐진다 . 같은 반복의 조립과 해체가 반복된다 . 수평이라는 실제와 관념이 물질과 운동으로 지속 ( 기 억 ) 되고 현현되는 반복 .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반복 , ‘자리 이동 ’ 이야말로 나의 작업에서 설 치 개념의 실천인 것이다 .
- 홍명섭의 ‘작가노트(topology of water ; Level casting)’ 2020
수평에의 의지
1976년 홍명섭은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한다, 그는 ‘서울중심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졸업 후 고향인 대전으로 낙향한다. 당시 미술계가 ‘수직’을 지향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수평’을 지향한다. 따라서 홍명섭의 ‘토폴로지컬 레벨(topological level)’은 1970년대 말로 거슬러 올 라갈 수 있다. 1978년 홍명섭은 계곡에서 천으로 설치작업을 한다. 그는 긴 백색 천을 계곡 의 위에서 밑으로 마치 폭포가 흘러내리는 것처럼 바위들 위에 설치해 놓았다. 그것은 일명 ‘천-폭포’ 작업으로 불린다. 당시 그는 긴 천에 돌들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묶어 계곡의 위 에서 밑으로 설치해 놓기도 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986년 그는 다시 계곡을 찾았다. 이번에 그는 천이 아니라 노끈을 가지 고 설치작업을 한다. 그는 노끈으로 계곡의 위에서 밑으로 마치 폭포가 흘러내리는 것처럼 바위들 위에 설치해 놓았다. 흥미롭게도 홍명섭은 일명 ‘노끈-폭포’에서 노끈을 마치 원고지 처럼 제작해 놓았다. 1986년 그는 자연이 아닌 실내 전시장에 거대한 바위를 옮겨놓고 ‘원 고지-노끈’을 바위와 바닥에 설치해 놓았다. 같은 해 그는 <레벨-캐스팅(level casting)>이라 는 부제로 전시장 바닥에 리놀륨판(linoleum plate)과 황동 막대(brass sticks)로 ‘원고지’ 형 태를 만들고 그 위에 솜을 설치해 놓았다. 그런데 솜에는 황동 막대로 눌러 만들어진 원고지 흔적이 남아있다.
1987년 그는 전시장 바닥에 리놀륨판과 황동 막대로만 ‘원고지’ 형태를 만들어 놓았다. 같은 해 그는 전시장 바닥에 블랙 마스킹 테이프(masking tape)로 원고지를 만들고 당구공들 (billiard balls)을 연출해 놓았다. 1988년 그는 전시장에 다양한 돌들을 바닥에 연출해 놓고 ‘원고지-노끈’을 설치해 놓았다. 따라서 홍명섭의 설치작품들은 수직에의 의지에 반(反)하는 일종의 ‘수평에의 의지’라고 할 수 있겠다. 1987년 그는 작업노트에 ‘수평에의 의지’라는 제 목으로 다음과 같은 텍스트를 적었다.
“물이 흐르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수평에의 의지를 가졌기 때문이리라. 말하자면, 물의 속 성은 수평과 같은 고요함을 찾아서 흐르게 되어 있다. 나 또한 작업을 통해서 나의 예술적 번민과 욕구를 가라앉히는 수평적 평온을 찾고자 하였다. 나이 마흔 고개를 넘으며 돌아보 건대, 내 작업은 내가 구현하려 하면 할수록 수평으로 가라앉고 위축되어서 마침내는 내 발 아래로 사라져가려 한다.”
‘그림자 없는(shadowless)’ 조각
전통적인 조각(sculpture)은 흔히 3차원의 공간 속에 구체적인 물질로 구현된 입체(solid)로 서 강하고 견고한 부피(volume)의 구성체를 뜻한다. ‘입체(solid)’는 3차원의 공간에서 여러 개의 평면이나 곡면으로 둘러싸인 부분 공간의 한정된 일부분으로 면으로 둘러싸인 것을 의 미한다. 부피(volume)는 입체, 즉 넓이와 높이를 가진 3차원의 물체가 차지하는 공간의 크기 를 뜻한다. 따라서 조각은 구체적인 물질을 소재로 하여 도구를 사용하여 3차원적 입체를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3차원적 조각은 그림자를 가진다.
그런데 홍명섭은 ‘그림자 없는(shadowless)’ 조각에 주목한다. 혹자는 전시장 바닥에 1cm 정 도밖에 되지 않는 리놀륨판들과 스테인리스 스틸 막대들로 설치한 홍명섭의 일명 ‘레벨-캐 스팅’을 ‘조각(sculpture)’이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 점에 관해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 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물론 홍명섭의 ‘그림자 없는’ 조각이 단지 시각적인 측면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다. 그의 ‘그림자 없는’ 조각은 전통적인 조각에 문제 제기를 서서히 진행하는 조각(creeping pieces), 즉 일종의 ‘토폴로지컬 조각(topological sculpture)’이라는 것을 깨닫 게 될 것이다.”
우리는 흔히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물은 늘 수평을 찾아 흐른다 고 말이다. 홍명섭은 거대한 호수를 바라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어떻게 하면 거대 한 호수의 수평면을 하나의 조각작업으로 포획하듯 그대로 떠낼 수는 없을까?” 그는 그 답 을 “한겨울, 호수가 얼어붙으면 그 표면의 매끄러운 얼음판”에서 찾는다. 이를테면 그는 “광 활한 수면을 칸칸이 잘게 잘라내어 또 하나의 장소로 한 장 한 장 옮겨서 다시 수면이 ‘되 게’ 조립해 나간다”고 말이다.
그런데 얼음을 전시장에 옮겨놓기도 전에 녹아버릴 수도 있다. 어렵게 얼음을 전시장에 이 동해 놓는다 하더라도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녹아버릴 것이다. 어떻게 하면 얼어붙은 거대 한 호수의 수평면을 하나의 조각작업으로 포획하듯 제작할 수는 없을까? 그 물음에 대해 미 술평론가 류병학 씨는 다음과 같이 추측한다.
“홍명섭은 얼음의 대안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던 ‘원고지’를 착안한 것 같다. 1978년 홍명섭 이 계곡에서 천으로 설치작업 할 당시 그는 원고를 원고지에 썼을 것이다. 원고지야말로 그 가 상상한 광활한 수면을 칸칸이 잘게 잘라내어 또 하나의 장소로 한 장 한 장 옮겨서 다시 수면이 ‘되게’ 조립해 나갈 수 있는 적합한 모델이라고 말이다.”
1978년 홍명섭은 서울미대학보에 개재한 원고 <표상세계에서 현장으로 : 리얼리티의 개현 과 소외에 대하여>를 원고지에 썼다. 1986년 그가 ‘원고지-노끈’으로 계곡의 위에서 밑으로 마치 폭포가 흘러내리는 것처럼 바위들 위에 설치했을 당시 그는 평론가협회의 한국미술평 론집에 개재한 원고 <제도론적 관행>을 원고지에 썼다. 그렇다! 1970년대와 1980년대만 하 더라도 원고를 대부분 원고지에 썼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원고지란 원고를 작성할 때 쓰는 일정 규격의 문서이다. 우리가 원고 지에 글을 쓸 경우 흔히 사용법에 따라 쓴다. 하지만 원고지 사용법에 절대적인 원칙이 있 는 것은 아니다. 홍명섭은 원고지에 글을 쓰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는 글로 말할 수 없는 것 을 원고지를 모델로 삼아 작업한다. 을 갤러리의 2전시장에 전시된 홍명섭의 <레벨 캐스팅 : 바닥이 되다(level casting : becoming a floor)>는 1987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되었 다. 이를테면 그는 리놀륨판과 황동 막대 혹은 리놀륨판과 스테인리스 스틸 막대로 전시장 특성에 맞추어 설치작업을 했다고 말이다.
홍명섭은 전시장 “여기서 저기로,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조립하는 반복”을 해오고 있다. 그는 “같은 반복의 조립과 해체”를 반복한다. 물론 그의 반복은 같은 반복이 아니라 장소의 차이로 인한 ‘차이로서의 반복’이다. 그것은 “수평이라는 실제와 관념이 물질과 운동으로 지 속(기억)되고 현현되는 반복.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반복”이다. 따라서 그는 “‘자리 이동’ 이 야말로 나의 작업에서 설치 개념의 실천인 것”이라고 진술한 것이다.
홍명섭의 설치작품들은 전시하는 장소의 특성에 따라 다르게 연출되었다. 이를테면 그의 설 치작품들은 예술가의 창작 과정이 행해지는 사적 공간인 스튜디오가 아닌 작품이 설치되는 전시공간인 일명 ‘포스트-스튜디오(post-studio)’ 작업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그의 설치작품들 은 일정 기간 전시된 후 전시가 끝나면 해체된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번 을 갤러리에 전시된 홍명섭의 설치작품 <레벨 캐스팅> 역시 일정 기간 전시된 후 해체될 것이다.
아트리스 아트(artless art), 그라운드 캐스팅(ground casting)
홍명섭은 1980년 중반 ‘노끈-폭포’와 ‘노끈-원고지’로 설치작업을 할 당시 스튜디오 작품들도 제작했다. 그의 ‘원고지-철판’(1985)과 ‘원고지-황동 막대’(1986) 그리고 한지로 ‘원고지-황동 막대’를 탁본처럼 떠낸 ‘원고지-한지’(1986) 또한 원고지 한가운데를 원형으로 오려서 기울여 놓은 ‘원고지-오리기’(1987) 등 일명 ‘그라운드 캐스팅(ground casting)’이 그것이다. 특히 ‘원 고지-오리기’는 이번 을 갤러리에 전시되는 M.D.F와 스테인리스 스틸판에 레이저 광선으로 그을린 400자 원고지 작업인 토폴로지컬 평면과 문맥을 이룬다.
홍명섭은 수평선과 수직선으로 이루어진 400자 ‘원고지’ 가운데 부분을 레이저로 커팅해 사 선 방향으로 기울여 놓았다. 따라서 관객이 ‘원고지’ 중앙을 보면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홍명 섭은 “작업을 통해서 ‘언어 시스템을 거치지 않는’ 토폴로지컬한 상상과 사유”를 관객의 “대 뇌에 직접적 자극으로 호소해 보려는 욕망이 있는 것 같다”고 진술한다.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는 “그의 간결한 행위는 관객에게 토폴로지컬한 상상과 사유를 하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토폴로지컬한 상상과 사유’란 무엇일까? 일단 ‘토폴로지’부터 살펴보자. ‘토폴로지(topology)’는 그리스어의 ‘위치’를 뜻하는 토포스(topos)와 ‘학문’을 뜻하는 로고스(logos)를 접목시킨 단어이다. 우리는 ‘토폴로지’를 ‘위상(位相)’ ‘위상수학(位相數學)’ ’위상기하학(位相幾 何學)‘ 그리고 ’공간배치‘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위상‘은 흔히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가지는 위치나 상태를 뜻한다. 따라 서 ’위상수학‘은 위상공간에서 도형의 길이 및 크기와 같은 양적 관계와 상관없이 도형 간 위치를 바꾸거나 연결할 때 휘거나 늘리거나 축소하는 연속적인 변형과정에서 변하지 않는 성질을 밝힌다. 그리고 위상수학은 자르거나 붙이는 변형 과정 속에서 얼마나 다른 도형이 있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위상기하학‘은 도형이나 공간이 가진 여러 가지 성질 가운데 특히 연속적으로 도형을 변형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성질을 연구하는 기하학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유클리드기하학에서는 형태를 변형시키지 않고, 단지 평행이동, 대칭이 동, 회전이동 등에 의해서 겹쳐지는 두 도형을 같은 도형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이러한 두 도형의 관계를 ‘합동(合同)’으로 일컫는다. 하지만 위상수학에서는 위상적 불변성을 공유하는 도형들을 구부리고, 늘이고, 줄이는 것과 같은 변형을 통해 같은 형태로 만들 수 있을 때 같 은 도형들로 생각한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종이 위에 삼각형과 원이 그려져 있다. 유클리드기하학에서는 이 둘은 완전히 별개의 도형이다. 그러나 위상기하학에서는 같은 종류의 도형으로 간주된다. 왜 냐하면 삼각형을 차츰 부풀려 변형해 가면 마침내 원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상기하학 에서 원,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육각형, 팔각형 등은 모두 같은 도형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위상기하학에서 각기둥, 각뿔, 원기둥, 원뿔, 구 등도 모두 같은 도형이 된다. 이를테면 위상 기하학에서 선분의 길이나 각도, 넓이, 부피 등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홍명섭이 말하는 ‘토폴로지컬한 상상과 사유’란 열린 상상과 사유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말하자면 탄성적(彈性的) 상상과 사유 말이다. 홍명섭은 원고지의 가운데를 절단해 사선 방향으로 놓아 관객에게 토폴로지컬한 상상과 사유를 하도록 만든다. 흥미롭게도 그의 작품은 ‘누구나 할 수 있기도 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어느 면에서 몰개성적이고 무기교적 작업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그의 작품은 일종의 ‘아트리스 아트 (artless art)’라고 말이다.
마인드리스(mindless) ‘메타-큐브(meta-cube)’
홍명섭의 토폴로지컬 조각 2점은 각각 정육면체와 원형을 변형시킨 일명 ‘메타-큐브 (meta-cube)’이다. 문득 안드레이 세큘라(Andrzej Sekula) 감독의 영화 <큐브2(Hypercube: Cube 2)>(2002)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큐브2>에서 주인공 제리는 큐브에 갇힌 사람들에 게 “4차원 입방체의 또 다른 명칭이 하이퍼큐브”라며, “1차원적인 것은 길이, 단순한 선을 의미하죠. 2차원적인 것은 길이와 넓이, 단순한 사각형”이라고 말한다. 그가 “여기다 한 차원 더 높이면 3차원적 큐브이고, 길이 넓이 높이를 지닌 큐브에 한 차원 더 높이면 그것이 바 로”라고 말하는 찰나, “4차원 입방체”라고 케이트가 답한다. 제리는 “4차원적 개념은 시간을 초월한다”고 덧붙인다.
홍명섭의 ‘메티-큐브’는 하이퍼큐브의 그림자를 3차원으로 작업해 놓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 다. 그는 “4차원의 하이퍼큐브도 3차원의 테두리를 통해 그림자로써 투영될 때마다 보는 각 도에 따라 각기 다른 다양한 입체형상, 즉 메타적 입방체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4차원 공간의 초입체가 3차원 공간에 놓일 때는 입체적 그림자로 현현한다”고 진술한다. 그것이 바로 뒤샹이 꿈꾸었던 ‘4차원의 그림자’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는 홍명섭의 ‘메타-큐브’를 “그림자로 ‘메타-월드(실재계)’를 상 상케 하는 작품”이라면서 그의 작품을 “일종의 ‘덧차원(extra dimension)’”으로 본다. 그리고 류병학 씨는 “덧차원 조각은 전통적인 조각의 개념을 넘어 우리에게 다양한 차원을 상상케 한다”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홍명섭의 ‘메타-큐브’는 ‘메타-월드’를 기하학적으로 해석/사유해 보는 일이 아닌가?
홍명섭의 ‘메타-큐브’는 “비인간주의적 감각들, 개념들의 저편, 또는 비개념적 발상/발동들. 사회적 잇슈와 통념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이질적 사고 형태들의 잠재력을 실험”하는 일종 의 ‘마인드리스(mindless)’ 조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인드리스(mindless)’는 흔히 ‘지성이 없는’ ‘비정한’ ‘용서하지 않는’ ‘무심한’ ‘신경을 쓰지 않는’ ‘개의치 않는’ ‘생각이 모자라는’ ‘아무 생각이 없는’ ‘어리석은’ 등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홍명섭의 ‘시대착오적이고 아나키스 트적 일탈의 제스처’는 다름아닌 ‘비주체적 작업 의지’에서 기인된다는 점이다.
미술평론가 류병학은 “홍명섭의 작품세계를 가로지르는 3가지 개념들(shadowless, artless, mindless)은 서로를 넘나들고 있다”면서, 그의 3가지 개념들은 흥미롭게도 “전통적인 미술의 고정된 개념을 해체시킨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홍명섭의 3가지 개념을 “일종의 ‘메 타-개념(meta-concept)’”이라고 부른다. 덧붙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근대적인 예 술가가 형이상학적 예술개념으로 사기 친 ‘사기꾼’이라면, 홍명섭은 형이상학적 ‘사기꾼’을 사기 치는 ‘메타-사기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를테면 그는 형이상학적 예술의 적수(敵手) 로 등장하여 근대예술을 해체시킨다고 말이다.”


